오늘자 조선일보는 시진핑 주석이 각국 군주들을 잇달아 초청하는 것을 두고 ‘왕의 친구’라는 제목을 달았다. 스페인 국왕과 태국 국왕의 방중을 하나로 묶어, 중국이 서방의 견제를 뚫기 위해 ‘왕실 외교’라는 특수한 카드를 쓰고 있다는 식의 해석을 내놓았다. 얼핏 보면 흥미로운 국제 뉴스처럼 보이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이 보도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중국도 아니고, 스페인도 아니고, 태국도 아니다. 사실상 미국의 이쁨받기를 목표로 하는 한국 보수 언론 스스로의 ‘충성 경쟁’에 가깝다.
스페인 국왕의 방중, 누구의 판단인가
기사에 따르면, 스페인 펠리페 6세 국왕이 18년 만에 중국을 찾았고, 경제·무역·과학기술·교육 분야에서 10건의 협력 문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이 소개된다. 여기에 “서방의 반발을 고려해 총리 대신 국왕이 나섰다”는 문장이 붙는다. 요약하면, 스페인 정부가 유럽연합의 대중 압박 기조 속에서도 경제 협력의 통로를 유지하기 위해 국왕이라는 상징적 카드를 선택했다는 뜻이다.
이는 전형적인 유럽식 ‘투 트랙’ 외교다. 대중 견제라는 미국의 지침형 의제는 유지하되, 각국이 자국의 경제 이해에 맞춰 채널을 열어 두는 형식이다. 실제로 스페인 국왕의 방중 목적은 투자 유치, 무역 확대, 에너지 협력 등 지극히 실무적인 이해관계 위에 놓여 있다. 유럽 각국 정상과 장관들이 수시로 베이징과 유럽을 오가며 같은 문제를 논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이 선택을 스페인의 외교적 계산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시진핑이 왕들을 불러들여 서방 견제를 돌파하고 있다”는 식의 구도로 재구성하고 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자국 국익을 위해 선택한 일인데, 한국 보수 언론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것은 곧 “중국의 공세에 흔들리는 서방의 방어선”을 보여주는 사례로 바뀐다. 행위의 주체가 스페인에서 중국으로 슬쩍 옮겨진 것이다.
태국 국왕까지 끌어다, ‘이상한 패턴’ 만들기
태국 국왕의 첫 국빈 방중 역시 기사에서는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군부·정부·왕실 간 복잡한 권력관계 속에서 태국이 중국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는 설명이 붙고, 중국은 태국을 우회 생산·투자의 거점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해석이 더해진다. 이 역시 따지고 보면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발생하는 특별할 것 없는 상호 이해관계의 조정이다. 동남아 등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는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니고, 태국 역시 미국·중국 사이에서 여러 차례 줄타기를 해 온 나라다.
문제는 여기서도 ‘왕’이라는 키워드가 다시 호출된다는 점이다. 기사에 등장한 스페인·태국은 물론 과거의 중동·아프리카의 사례를 한데 뒤섞어 “시진핑이 각국 국왕과 잇달아 회담하는 모습 자체가 중국 내부에서 지도자 위상 강화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유도한다. 결국 왕이 오든 대통령이 오든, 총리가 오든, 시진핑과 만나면 그 사건은 모두 “권위주의 지도자의 위상 강화”라는 하나의 해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외교를 ‘모함의 언어’로 바꾸는 기술
중국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 군주제 국가와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도, 유럽도, 중동도 서로의 이해가 맞을 때면 군주제 국가와 정상회담을 하고 군사·경제 협력을 쌓아왔다. 왕이 오면 의전이 화려해지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왕실이 상징 자산을 제공하고, 정치는 그 상징을 외교와 경제에 활용한다. 이것은 제도 차이, 이념 차이를 떠나 오늘날 국제 관계의 ‘통상적인 풍경’이며, 원칙도 없다. 그리고 가장 이율배반적인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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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일보의 기사 속에서는 이 통상적인 풍경에 중국이라ㅡㄴ 글자가 들어가면 ‘특수한 사건’으로 포장된다. 단어 선택과 문장 구조가 그렇게 작동한다. “왕의 친구”, “왕실 외교”, “외교 카드”, “서방 진영 견제의 돌파구” 같은 표현이 쌓일수록, 독자는 자연스럽게 “중국은 무언가 기묘하고 위험한 외교술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기사 본문이 전하는 사실 자체는 평범한데, 그 사실을 묶는 제목과 문장이 끊임없이 의심과 경계의 감정을 자극한다.
더구나 이 기사에는 중요한 빈칸이 있다. 스페인과 태국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내부 논리, 그리고 미국과 유럽이 실제로 중국과 어떻게 ‘동시에’ 협력과 견제를 병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맥락이 빠져 있다. 마치 서방 전체가 단일한 ‘반중 전선’으로 서 있는데, 중국이 그 틈을 파고들어 왕들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묘사된다.
한국의 대중 인식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
이런 프레임이 반복될수록, 한국 사회에서 중국을 둘러싼 논의는 점점 더 단순해진다. ‘좋다/나쁘다’, ‘자유/권위’라는 도식만 남고, 정작 중요한 질문들 — 예를 들어 “한국은 스페인처럼, 태국처럼 경제와 안보를 어떻게 병행 조정해야 하는가”, “미·중 경쟁 속에서 자율성을 확보하려면 어떤 외교 레퍼토리가 필요한가” — 는 뒷전으로 밀린다.
미국조차 중국과 고위급 대화를 지속하며 갈등 관리에 나서는 상황에서, 한국 보수 언론은 그보다 더 앞서 나가 “중국과의 어떤 접촉도 의심스럽다”는 메시지를 집요하게 생산한다. 외교의 현실을 독자에게 설명하기보다, “우리는 누구 편인가”라는 정체성 확인 게임을 반복하는 셈이다. 그 결과 한국의 정책 선택지는 줄어들고, 국내 여론은 유연성 대신 감정적 반발에 점점 더 예속된다.
미국을 향한 ‘충성 경쟁’으로 보이는 이유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인상으로 귀결된다. 중국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스페인과 태국은 각각 자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움직인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언론은 한국의 국익보다 ‘미국이 어떻게 볼까’를 먼저 의식하는 듯한 구도를 스스로 짠다. 중국을 비난하고, 중국과 접촉하는 다른 나라를 ‘흔들리는 서방’으로 묘사할수록, 미국의 시선을 의식한 ‘모범적인 동맹국’이라는 자기 이미지가 강화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런 식의 보도가 실제로 한국에 어떤 도움을 주느냐는 것이다. 중국을 비판할 수 있다. 비판해야 할 지점도 많다. 하지만 스페인·태국 국왕의 방중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외교 이벤트를 ‘왕의 친구’라는 제목 아래 모함의 서사로 포장하는 것은, 중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독자의 사고 능력을 해치는 짓에 가깝다.
언론이 할 일은 “누가 누구 편인가”를 감시하는 도덕 경찰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각국이 어떤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이 한국에 어떤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주는지, 가능한 한 차분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야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독자의 판단은 반중적이어야 한다는 지점을 향하고 있다.